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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생존기― 여성의 호명과 자리들

  • 작성일 2022-09-09
  • 조회수 1,765

비주류 생존기

― 여성의 호명과 자리들

황유지




들어가며 : 너의 이름은


코로나19 팬데믹은 우리에게 ‘거리 두기’를 요청한다. 침방울이 튀지 않을 거리 감각은 생존법인 동시에 프리즘으로 작용하며 그간의 일상을 한 발짝 떨어져 보게 한다. 이 상처적 기회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편의주의와 관습의 산물임을 적나라하게 들추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변할 수 없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의 경계는 해체되고 있다. 경계는, 비자발적 기회를 빌려 기성의 공고함을 흔들고 억압된 것들의 틈입을 허락하며 제 몸을 지워나간다. 욕망들의 이유 있는 항변이 저마다 기입될 때 우리 사회는 재배치의 가능성을 향해 열리기도 한다. 재난 이후의 삶은 지속되는 현실을 직시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숱한 이름들은 남성의 것으로, 여성에게 지워진 경계는 그들을 정확한 이름 없이 비주류로 포괄하곤 했다. 가령, 남성 이미지가 우세한 ‘청년’은 절반이 다른 절반을 지우는 방식으로 전체를 대표해왔다. 많은 이름들이 남성을 과잉 대표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그 단어에 남성성을 각인하는 식의 패러다임을 만들어온 것이다. 해서 우리는 뒤늦게 ‘여류’라든가 ‘여성’과 같은 수식언을 덧대는 식으로 불완전한 단어를 수습해야 했다.
우리는 부쩍 많아진 여성 서사들을 통해 다양한 여성의 모습과 마주한다. 숱한 여성 주인공의 등장은 사회 구성 주체로서 여성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요청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찾기’가 함축하듯, 서사 속 주인공들이 우리 삶에서도 반드시 주인공은 아니라서, 그들의 ‘자리’는 아직 제대로 없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제출되는 여성의 호명과 그 자리들은 계급화되고 위계화된 형태로 우리 사회에 숨어 있던 여성의 일과 삶을 가시화하며 그들의 ‘자리 없음’을 표명한다. 지난 세대의 억압적 형상들과 권력의 지형도, 성차별적 인습의 내밀화 등이 응집된 사회적 맥락으로서 여성의 자리는 이제 호출되기 시작한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라는 말을 빌려 말하자면, 이름을 만들고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사회적 확인이라는 인식 범주로의 진입은 시작되고 인식은 공론화의 가능성을 얻는다. 그것은 은폐된 것들을 드러낼 기회를 갖는 일이다.1)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들을 어떻게 불러왔던가? 이들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주변부로 비켜나 있던 여성과 여성의 일, 그 자리에 대한 사유와 재배치 작업의 시작일 수 있다.
국가사회의 위기는 여성을 때로 ‘아내’로, 때로 ‘노동자’로, 때로 ‘아줌마’로 호출하며 그들의 노동력을 사용해왔다. 산업화 시기에 단순 노동, 서비스 노동을 담당하며 ‘여공’이나 ‘식모’로 불리던 여성 청년2) 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 가족 부양의 책임자였지만 어디까지나 ‘장차 큰일을 할 아들’을 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뿐이었으며, 그러한 관행은 우리 사회의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있기도 하다. 감염병의 장기화로 경제에 경고등이 켜진 지금, 여성의 자리는 더 위태로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특히 ‘돌봄 공백’은 고스란히 여성의 책임으로 전가되고, 여성은 그만큼 공적 자리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워야만 하는 은근한 강요 앞에 놓인다.3) 여성의 영역들은 공공의 위기 앞에 허무하게 삭제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자리라고 인식되었던 영토란 안팎으로 허약하다. 그러나 남성 전유 영역이 허물어지거나 폐쇄되는 현실은 모든 것의 재편 가능성을 역설하기도 한다. 지금은, 우리의 인식 좌표를 ‘영점’에 놓기 적절한 때이기도 하다. 여기, 여성들의 생존기 몇 편을 가져와 얘기해보자.4)


1) 리베카 솔닛, 「정치와 미국의 언어」,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서문, 김영남 역, 창비, 2018.
2) ‘여성 청년’이라는 호명이 ‘여류 작가’나 ‘여성 대통령’식으로 오히려 여성의 소수자적 위치와 차별화를 부각하는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지금까지 일하는 젊은 여성은 우리 사회에서 ‘아가씨’ ‘~양’ ‘미스’ 등으로만 불렸을 따름이며 이런 호칭은 현재는 상대적으로 고급직종에 종사하는 여성에게는 직책이나 이름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어 단절된 듯 보이지만, 여전히 단순·서비스 종사자에게는 유효하다. 그러니까, 이 호칭에는 산업화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역사적으로 혁명적‧정치적‧사회적 삶의 주동 세력으로서의 청년이 남성을 쉽게 대체해왔음은 사실이다. 따라서 ‘여성 청년’이 청년의 범주에 여성의 자리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호명하였다.
3) 주부 노동의 경우는 무급 노동에 더해져 타자와 인정 투쟁을 다투어볼 수도 없는 ‘고립’ 노동의 성격을 띠면서 그 가치에 대한 평가 자체를 절단당해온 것이 사실이다. 사회의 자리를 지우고 가정으로 들어오는 여성에게 돌봄은 다시 고립 노동으로 돌아온다. 정은경, 「포스트 휴먼 시대의 여성의 노동」,《크릿터》, 2020년 1호 참고.
4) 이 글에서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김세희, 「드림팀」, 『가만한 나날』, 민음사, 2019.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 현대문학, 2020.; 『9번의 일』, 한겨레출판, 2019.; 『딸에 대하여』, 민음사, 2017.; 「아웃포커스」, 『어비』, 민음사, 2016. 김금희, 『복자에게』, 문학동네, 2020.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0. (본문 인용 시 해당 쪽수만 밝힘).


버티는 ‘아줌마’들


‘아줌마’라는 호칭은 쉽게 계급적 인식을 드러내고 기혼 여성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곤 한다. 기혼 여성이 가정과 일터에서 수행해야 할 업무의 양은 절대적으로 방대한데 비해 그들의 노동력은 자주 홀대받는다. 특히, 출산과 육아라는 문제를 공적 장소로 끌고 나올 때나, 공적 장소에서 실수를 할 때 이 호칭은 간단히 혐오를 생산하며 멸칭이 된다. 그런 ‘아줌마’의 사정 저편에서는 ‘인턴’ ‘계약직’ ‘비정규직’과 같이 한시적 일자리의 불안정성을 거듭 개인의 삶에 각인시키는 고용의 문제가 청년들을 조종한다. ‘너 아닌 내’가 안착하기 위해 직장 내 관계들은 자주 의심하고 반목한다. 김세희의 「드림팀」은 ‘여성 청년’과 ‘아줌마’의 버티기 그 차이를 보여준다.
누구보다 오래 일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사수 ‘임은정’은 다른 팀원을 대할 때는 적대적이지만 ‘선화’에게는 업무뿐 아니라 태도까지 가르친다. 임은정을 세심하고 다정한 상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을 넘는 선배의 과한 유대는 ‘꼰대’로 평가되기 마련이며, 선화 역시 이런 관계가 불편하다. 임은정의 모습은 우리 사회 기혼 여성 노동자와 쉽게 겹쳐진다. 경쟁을 당연시 받아들이고 결혼과 임신, 출산의 과정에서 해고에 가슴 졸이고, 조직과 사회의 구조적 차별에 대해서 의심하는 대신 개인의 능력으로 대응하며 사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많다. 여성은 결혼 특히 출산과 함께 왜소해지고 마는데, 회사라는 공동체에 언제 해를 끼칠지도 모를 위험한 ‘아줌마’로 ‘전락’할 수 있는 인자로 취급되는 것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1년이나 육아 휴직을 썼고, 자폐를 앓는 아이가 언제 호출을 할지 모르는 임은정은 늘 불안하다. 입버릇처럼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말하는 그녀는 우리 사회가 낳은 꼰대이기 이전에 피해자일 것이다. 임은정은 자신의 조건을 열등감으로 치환하며, 후배에게 그 상황과 감정을 이입하려 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차별과 성별 분업을 내재화하여 스스로를 제한하고 선화에게마저 물려주려 했던 그녀의 태도는 생존 전략이었지만, 선화는 그것을 거부함으로써 단절한다.
김세희가 포착하는 것은 그런 ‘여성들’이 혼재해 있는 사회, 그 정념의 단면이다. 그리고 그 양상은 이제 이동 중이다. 선화가 임은정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개인의 성향에 따른 부적응이라고만 할 수 없다. ‘드림팀’의 신화를 깨는 것은 ‘무조건 해내겠습니다’가 아닌, ‘나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선언이자 과도한 성취 앞에 혹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명확한 태도 표명이다. 또한 이는 성과와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슈퍼우먼에 대한 환상을 부수는 것으로, 성공 신화를 믿지 않는 지금 여성 청년들의 ‘쿨함’이기도 하다.
이 소설이 임은정이 아닌 선화라는 필터로 발화되고 있다는 것을 짚고 가자. 선화라는 인물은 지금 여성 청년의 표상이면서 동시에 ‘쉬운’ 노동력이다. 결혼과 육아를 병행하며 아등바등 버티는 ‘아줌마’가 아닌, 언제든 서로 쿨하게 고용하고 고용될 수 있는 젊은 노동력을 회사는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다. 그렇다면 혹시 ‘아줌마’에 대한 불편함은 과도한 가족애에 기댄 불합리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여성, 그것도 기혼 여성 노동자에 대한 신자유주의식 정치적 효과는 아닐까? 선화의 적대 의식 속에 제대로 된 노동 환경을 제공받지 못한 ‘아줌마’의 사투에 대한 연대 의식이 있었을까? 이를 두고 누구도 쉽게 임은정이나 선화와 같은 개인의 문제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버티는 아줌마’는 얼마든지 있다. 『9번의 일』은 일로부터 끊임없이 소외되며 추락하는 노동자의 삶을 따라가는데, 본사 직원이었던 주인공이 하청업체 소속의 ‘9번’으로 변모해가는 와중에 만나게 되는 ‘황 여사’를 이 글에서는 언급하고 싶다. 먼저 ‘여사’라는 호칭은 노동의 장에서 타당한 호명법이 아닌데 그것은 ‘9번’도 마찬가지여서, ‘9번’이라는 호명이 남성 인물을 무성의 존재로 변질시킨다면 ‘여사’와 같은 호명은 그 표의와 무관하게 직책이 따로 없고 나이가 많은 여성을 성별로 낙인하여 제한하고 그 제한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약화한다. 황 여사는 콜센터에서 일하다 느닷없이 외딴곳으로 밀려나게 된 인물로, 김혜진의 다른 소설 「아웃포커스」의 ‘엄마’와 겹쳐 있다. 황 여사와 엄마는 노동의 이중 소외를 겪으며 아웃포커싱 된 자리에서 ‘아줌마’의 일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재현한다. 「아웃포커스」의 엄마가 해고를 당하며 일에서 배제된 삶으로 밀려날 때, 정작 그녀를 외롭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할머니의 묘 이장과 보상금 문제로 엄마의 형제들은 엄마를 소집한다. 20년 동안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다 하루아침에 정리해고된 ‘아줌마’의 노동 소외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 죽어서도 떠오르는 가족이라는 이름은 여성의 자리를 줄기차게 가정으로 호출한다. 그러나 엄마는 1인 시위라는 ‘일’을 하루도 쉴 수 없다. 1인 시위는 한 사람의 일이지만, 그것은 시위라는 형태로 공론화 가능성을 연다. 동시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 행위는 역설적으로 엄마가 노동자라는 주체로 서는 유일한 사건이기도 하다. 비정규직 기혼 여성 노동자의 ‘자리’는 일자리를 잃고서야 그토록 선명하게 가시화된다.
한편, 『9번의 일』의 황 여사는 전신주에 용감하게 올라가 해본 적 없는 작업을 시도하지만, 결국 공포에 질려 소동을 피운다. 회사라는 자본권력으로부터 직업을 빼앗기다시피 한 9번 앞에서 같은 처지의 황 여사가 ‘민폐 아줌마’로 그려지는 것은, 남성 노동자로부터 한 번 더 소외되는 여성 노동자의 자리를 더욱 냉정하게 기입한다. 황 여사가 오르지 못한 전신주는 실제로 현현한 유리 천장이다. 그것은 그녀가 오르지 못한 남성의 영역이라는 구조적 장벽이다. 그 막막한 심정을 황 여사는 공포로 체현하지만 다음번에는 더 높이 오르리라 마음먹고, 아웃포커스된 엄마는 1인 시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도 끝까지 ‘자리’를 버티는 것만이 지금의 ‘아줌마’들이 노동의 장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아줌마식 앙가주망일지도 모른다.


여성의 문법으로


여성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말하고, 그 말들이 허공에 흩어지지 않도록 서로가 서로의 말을 기억하고 증언하는 매개가 되어줘야 한다는 메시지는5) 여성 서사 자체의 책무이기도 하다. ‘아줌마’들의 ‘자기 정의’6) 과정을 보여주는 윤이형의 「작은 마음 동호회」에서 ‘글쓰기’는 경력단절 여성의 자기 회복을 촉구하는 동시에 연대의 출발을 가능케 한다. 김금희의 『복자에게』에서는 ‘편지’가 그 역할을 도맡는다. 그것은 고백과 증언의 이음줄로 또 다른 유대를 향한 이해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특히, 문법을 바꾸면 어떤 문제의 가동이나 제동이 누구의 책임인지가 바뀌게 되고 결국 이야기의 주체가 누구인지 달라진다는 말마따나,7) 이 글에는 문법을 고쳐 쓰기 위해 애쓰는 인물들이 있다.
한때 제주의 부속 격인 ‘고고리 섬’ 보건소 의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대전의 연구소에서 일하는 ‘정희 고모’는 “정상이 아닌 동거 생활”(148쪽)을 하고 있다. 친구 ‘규정’을 향해 답장이 오지 않을 편지를 쓰며 살아온 정희 고모는 이 글에서 가장 이상화되었으면서도 기존 문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현재의 ‘나’에게 전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 운동권 남자친구의 사망사고에 얽힌 규정은 형벌을 받고, 그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정희 고모는 밤마다 타이프라이터를 앞에 놓고 편지를 쓴다. 규정은 출소 후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 생은 오래가지 못했고, 정희 고모는 규정을 대신하여 그녀의 남편과 아이를 돌보며 ‘정희 엄마’로 살아간다.
과거, 학생운동과 법이란 남성권력과 힘의 상징이다. 이 등치 앞에서 정희 고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삶을 던진다. 그것은 실천적 투신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운동권력의 허위에 대한 단죄이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책임의 전면 수용처럼 보인다. 그것이 결국 ‘돌봄’으로 귀착되는 것을 유감으로 지적할지도 모르나, 돌봄 자체가 결코 허약한 대안은 아니다. 무엇보다 정희 고모의 돌봄은 남성권력 사회와 사법의 정의 윤리가 거듭 타자화한 개인의 삶에 대한 친밀성과 책임으로의 윤리적 실천이자 정의의 실천이다. 어쩌면 “타인의 삶을 찢고 들어가는”(110쪽) 일은 그렇게 구현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희 고모의 자리는 ‘정상적 삶’의 문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정상’이란 단어야말로 주류의 안전망으로, 그 망을 벗어난 것들은 혐오와 멸시를 배태하며 주변부로 밀려나기 십상이다.8)
정희 고모의 뚝심은 중심부에서 배제된 한 여성의 자리를 끝내 끌어안는 것으로, 생존의 서열을 바꾸는 민주화 투쟁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정희 고모는 “우리끼리의 말”(162쪽)을 찾기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고고리 섬에서, 타이프라이터 앞에서 고뇌했는지도 모르겠다. 정희 고모의 타이핑은 속죄로 출발한 정화의식이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욕망이며 조각난 세계를 재배치하는 꾸준한 준비이면서 실천을 위한 구체적 발음들을 담은 사전이다. 정희 고모의 ‘쓰기’는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부르고 실천할 자신만의 문법을 기획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행위이다.
판사 ‘나’는 지금까지 남성권력으로 치부되었던 법의 문법 앞에 섰다. 그리고 제주에 좌천된 ‘나’의 앞에 의료원 사고가 놓여 있다. 약품 빻기에 동원된 ‘복자’를 비롯한 다수 간호사들이 유산했다. 어깨가 아픈 여성 재봉노동자는 작업장에서의 노동으로 어깨 통증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렵지만, 남성 건설노동자가 다리 통증을 호소한다면 쉽게 재해 인정이 된다는 사례는, 여성에게서 생활 노동을 분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9) 간호사들의 유산, 즉 모태로서의 여성의 몸에 대해 법은 어떠한 해석을 내렸는가? 그것은 여성의 몸을 해석할 정당한 문법인가?10) 노동하는 여성의 육체, 모태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법의 문법과 싸우고 있다.
후배들의 롤모델이었지만, 이혼 후 과중한 업무를 이유로 양육권을 뺏기는 ‘양 선배’의 삶은 일‧가정 양립의 문제를 개인의 능력에 부치는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모유 수유를 하며 법대(法臺)에 섰던 양 선배에게 돌아온, 출산과 동시에 모체와 아이는 분리된다든가 재판석에는 지정된 자만이 앉을 수 있다는 식의 논법 역시 여성이기 때문에 ‘어머니 노릇’과 ‘노동 시장 참여’를 잘 병행해야 한다는 당위와 그러지 못할 경우 ‘엄마’를 박탈하겠다는 논리가 마치 겁박처럼 작동하는 가혹한 현실을 짚는다.
영광의료원 원장 부인이 흔히 그렇듯 ‘사모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고 세례명으로 불리는 것도 언급하자. 얼핏, 여성의 독립적 문법으로 해석될 뻔한 이 부분은 그녀가 원장의 ‘재취’라는 것이 드러나며 싱거워져 버린다. 타인이 불러주는 호칭은 그들의 의식과 관습에 기반하여 철저히 계급성을 띤다. ‘바깥일’을 하지 않는 그녀에게 허락된 사회적 호명의 자리는 남편에 기댄 것뿐인데, 그마저 결혼으로 고정된 ‘자리’에 기반하여 ‘재취’를 불필요하게 확인시키고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왜 제주라는 자리를 택했을까? 주지하듯, 남성이 지워진 자리에서 굳건히 남아 섬과 삶을 꾸려나간 이들은 여성이었다. 이 소설에서 ‘나’의 두 번에 걸친 섬 행은 각각 ‘도피’와 ‘유배’의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도시로부터 거리 두기로 기능한다. 도시의 삶은 성과 위주의 과잉된 삶이다. 여성들은 그 속에서 생존을 위한 분투에 가려진 관료제 시스템의 폭력성을 자주 지나치곤 한다. 특히 ‘나’와 같이 고학력 여성 노동자일수록 성공을 지향하는 구도 속에서 젠더의식을 절단당하고 중성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시스템과 권력으로부터의 거리 두기로서 제주나 고고리 섬은 제법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소설 속 섬은 힘의 재배치를 가능하게 하는 특수성, 즉 ‘영점’으로, 가능성을 향해 사방이 열린 무대이다. 제 피와 살을 떼어냄을 연대의 출발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저 간호사들의 싸움은 이미 모성을 초월한 자기 인식에 닿아 있다. 평생 물질해 마련한 집을 아들이 아닌 복자에게 남겨준 ‘할망’이 꿈꾸었던 세상도 어쩌면 그런 열린 무대와 닮아 있을 것 같다.


5) 조연정, 「자신을 존중하는 여성들의 이야기-윤이형의 『작은 마음 동호회』를 읽으며」, 《문학과사회》, 2019년 겨울호, 120쪽.
6) 『흑인 페미니즘 사상』의 저자 페트리샤 힐 콜린스의 ‘자기 정의’는 “외부로부터 규정된 통제적 이미지에 도전하는 강력한 저항의 방법이자, 타인을 해석할 권리를 지녔다고 착각하는 특정 주체의 권력을 해체하는 유일한 방법”으로써의 과정이다. 조연정, 위의 글.
7) 리베카 솔닛, 「팬데믹과 마스크 쓰지 않는 남자들-남성성의 극단적 이기심, 여성의 늘어나는 돌봄 부담」, 이종임 역, 《창작과비평》, 2020년 가을호, 323쪽.
8) 정희 고모가 이룩하려는 삶의 재배치가 한 인물에 의해 추동된다고 할 때, 그 이름이 ‘규정(rule, code, regulation)’인 것은 우연이겠지만, 규정이 사라진 자리에서 정희 고모의 문법이 새로 쓰인다는 점에서 정희라는 인물이 극복해야 했던 대상은 어떤 의미로든 규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9) 물론, “남성의 피해는 여성의 피해에 대한 반증이 아니라 젠더화된 사회에서 각각의 성별은 계급과 연령 등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경험한다는 증거”일 수 있다는 말은 타당하다. 권김현영, 「여성은 잠재적 피해자인가?」,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김은실 엮음, 휴머니스트, 2020, 41쪽.
10) 소설은 간호사들의 승소라는 결과를 알린다. 이 글의 모티프가 된 ‘제주의료원 간호사 집단유산 사건’은 2009년 소송 제기된 이후 2014년이 다 저물어서야 산재 인정을 받는다. 이것이 우리 법에서는 최초로 여성 노동자들의 유산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사례이다. 근로복지공단과 제주의료원의 책임회피로 대법원 판결까지 이른 이 재판은 2020년 4월 최종승소 판결을 받는다. 소송을 제기한 지 11년 만이다. <최초로 집단유산 산업재해로 인정되다>, ohmynews, 2015. 02. 13, <대법원 “여성 노동자 유산은 업무상 재해” 인정>, 프레시안, 2020. 05. 14. 기사 참고.


불친절한 공간들


공적 자리에서 여성들은 종종 ‘여성처럼 보이되 남성처럼 행동하라’는 주문을 듣는다. 이는 여성 청년들에게 알파걸을 강요하는 한편 기혼 여성에게는 출산과 육아 문제를 ‘바깥일’하는 데까지 끌고 오지 말라는 모순적인 요청들과 함께, 여성에게 혼종적 정체성을 요구한다. 반면, 여성에게 여성다움을 가장 요구하는 자리는 사적 자리, 가정이 아닐까? 여성에게 가정의 문법은 어떠한 검열도 없이 선천적 성차에 의한 규정으로 여성성을 주입한다. 그러나 이런 ‘주입식 교육’이 정체성을 영구적인 것으로 결박하지는 못한다.
『딸에 대하여』는 주류로부터 비켜 서 있는 여성들의 노동과 삶을 집으로 흡수하여 새로운 배치를 통해 ‘아버지의 집’이라는 전통적 관습의 가정을 전복한다. 이는 가정에서 사회로 나가는 생의 구조를 역행하며, 이미 사회로 나갔던 여성들의 정체성을 재배치하는 자리로서 집을 그린다. 가정이라는 공간이 성별에 따른 차별화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가부장제 기반의 사적 공간이라는 인식을 지우고 소설은 남성이라는 구조적 권력의 상징을 일시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여성 인물들을 새로운 인식의 ‘영점’에 놓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엄마이자 요양보호사였던 ‘나’의 돌봄 노동이 자발적 의지와 선택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자리, 학자로 이타적 삶을 평생에 걸쳐 실천한 ‘젠’의 여생이 유명세나 자본의 손길 대신 순수한 타인의 사랑으로 보듬어지는 자리, ‘딸애’와 ‘동성애인’이 동반자로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자리로서 집이 새로이 지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정’이나 ‘성차’는 상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추상이고 그 개념을 뒤집기는 힘들지만, 공간을 채우는 사람의 이야기가 달라지면 그 안의 추상들은 바뀐다. 고단한 억압의 장에서 잠시 놓여나 느슨한 오후를 즐기는 이들의 화해의 순간과 겹치는 소설의 마지막은, 수많은 대안적 가능태로서 집이라는 공간이 재탄생하는 순간이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은 수업 시간 갑자기 쏟아진 생리혈로 곤란하다. 날짜에 따른 생리혈의 양과 그에 따른 대처법, 더불어 공중화장실에서 탐폰 사용의 까다로움까지 제법 상세히 기술한 장면은 실질적이고 왜곡 없는, 일상이라는 자리에 놓인 여성의 몸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라 눈이 간다. 성별화 메커니즘이 아닌 사회‧문화적 유대의 맥락으로 쓰이는 몸 이야기는 편입생 희원과 ‘선생님’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먼저 이 일화는, 희원이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선생님이 강단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와 희원에게로 다가오도록 이끌며 두 사람의 높낮이를 허문다. 얼룩진 옷을 수습하기 위해 나란히 걷는 길, 생리 경험에 기댄 두 여성의 공감대는 희원에게 왜곡 없이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한다. 강단에서 내려선 선생님이 왜소해 보임은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평등한 시선에 근거한다. 우리 모두 최초의 공간인 몸을 통해 다른 공간과 만난다.
희원은 선생님의 에세이를 읽다가 서로 ‘용산’이라는 공간을 경험적으로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선생님과 희원이 공유하고 있는 ‘용산’과 ‘대학’이라는 공간은 두 여성을 에워싼 폭력과 권력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그런 공간과 겹쳐 있는 여성의 삶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지워지는지를 찬찬히 짚어나간다. 용산 ‘그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희원은 숙취로 자고 있었고 선생님은 소논문을 쓰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상처’받았는데, 그것은 ‘부끄러움’에 닿는다. “간극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좌절감”이라는 부끄러움은, 결국 주체 형성에 필수적인 책임과 연결된다. 부끄러움을 윤리적인 것과 속물적인 것으로 나눈다고 할 때, 선생님의 부끄러움이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간극인 윤리적 부끄러움 쪽이라면, 희원의 경우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함으로써 생겨난” “감추고 싶은 자기 약점”을 들킨 것과 같은 속물적인 부끄러움에 가깝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개인의 허약성을 부각시키고만 비애이며 윤리적 상처이다.11)
공간의 폭력성과 정치성은 건물을 둘러싼 저 무자비한 암투와 분쟁뿐만이 아니라, ‘비정규직’ ‘여성’ ‘강사’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학생들의 사고와 그것의 표출 방식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그들이 여성의 자리에 대한 과거의 인식을 주입한 대타자로서 성장한 동시에 신자유주의식 생존방식을 자연스레 익힌 대학생, 청년들이라는 데 그 비극성은 더해진다. 더불어 내게 불이익을 줄 힘이 덜하다고 여기는 상대 앞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발언이 가능한 것은 역설이다.
이 소설은 크게 공간이 점유하고 있지만 그 공간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글쓰기’를 통해 자기 부정을 벗고 자신만의 언어로 ‘자기 정의’에 이르고자 하는 이야기도 품고 있다. 그래서 선생님의 글쓰기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젊은’ ‘비정규직’ ‘여자’ ‘강사’라는 그녀의 자리를 상기시킨 희원의 말끝에 선생님이 끝내 삼킨 말은 무엇이었을까? 공적 구조가 개인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타자로부터의 정의에서 벗어나 자신의 언어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 즉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 반대되는 행위”(75쪽)이자 “자기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77쪽)으로서 선생님은 글을 써 왔던 것이다. 흔히 ‘착한 딸’로 자라온 우리 사회 많은 여성들은 모험이나 의심 등으로부터 단절될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받았다.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를 기반으로 유지된 가부장제 아래 자라난 이 딸들은 “능동적인 순종”(76쪽)에 익숙하다.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자기 인식의 첫걸음을 뗀 희원이 10년이 지나 선생님과 같은 자리에 섰을 때, 어디에도 선생님의 흔적은 없다. 용산이라는 공간의 혼종적 폭력성 속에서 상처 입은 말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영어를 택했던 선생님은 “한국어 억양이 강하게 드러나는”(55쪽) 자신만의 영어로 꾹꾹 눌러가며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기 부정을 완전히 벗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선생님의 언어는 모국어로부터 달아난 타자의 언어가 아니었던가. 선생님의 자기검열은 또 한 번 그런 자신의 한계와 마주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많은 여성들이 그렇게 자라고 성장하고 소멸했을 것이다. 공적 인간으로서 한 여성의 소멸이 이토록 간단할 수 있는 것은 결코 개인의 능력 부족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의 글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유감이지만, 그것은 이제 희원에게로 이전되어 다음의 빛으로 이어질 것이다. 빛을 밝히는 동안 그 주변은 목적지로 기능할 수 있다.
최은영이 짚어내는 자리는, 보편적 경험의 응시 속에 있다. 지역성에 기초한 나고 자라남의 공간과 인지와 지각에 기반한 학문의 공간은 모두 “우리가 세계에 고정됨을 표현”12)한다. 그래서 특정 공간을 반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우리가 일상성으로 여겼던 세계의 문법들이 공간이라는 표상을 통해 어떤 폭력의 구도를 우리에게 각인시키지나 않았는지, 우리의 자리를 한번쯤 의심해보게 한다. 우리는 숱한 공간 속에서 자란다. 많은 공간은 인식을 통제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다.
김혜진의 『불과 나의 자서전』에는 보통 사람들, 보통의 축에 끼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자본주의와 결탁하는 장이자 표상으로서 공간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관찰하는 ‘홍’이 있다. 동네는 재개발지역을 기준으로 나뉘었는데, 중앙동에 비해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남일동은 낙후와 소외의 상징이 된다. 그런 남일동으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주해’가 들어온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소아과에서 의료사고가 발생하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 주해에게 사람들은 끝까지 책임을 묻는다. 주해에게 공간은 상황과 겹치며 그녀를 옥죈다. 막다른 산 아래 집까지 피해자들이 찾아오며 주해의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의료사고의 진짜 책임자들은 이미 피해자들이 ‘감히’ 찾아오지 못할 공간으로 숨었을 것이다. 다시, 먼 곳 더 구석진 곳으로 도망치는 주해와 여덟 살 아이에게 공간은 보호막이 아닌 위계와 권력의 피라미드일 뿐이라, 그들은 세계의 기표를 획득하지 못한 채 자꾸만 미끄러진다. 그러나 일과 삶에서 거듭 소외되면서도 주해는, 골목길 끝까지 버스가 들어오게 건의하고, 가로등을 설치하도록 의견을 내며, 아이의 진학을 위해 행정구역에 대해 항의한다. 이런 여성의 고군분투는 개인적 삶의 의지라거나 성취로만 여겨야 하는 것일까? 주해의 이런 노력 역시 ‘아주 희미한 빛’의 일종이라면, 이미 우리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식으로 여성의 삶을 개인의 희생에 부치는 문장을 넘어서는 지점에 와 있다. 타인을 경유하지 못하고 흐르는 홍의 언어는 어디까지나 불과 ‘나의 자서전’밖에 될 수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자조적 글쓰기조차 타인과의 관계가 미숙한 인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시작일 수도 있다.
우리의 ‘빛’은 그토록 사소한 데 비해 공간은 육중한 실체성을 가지고 있어, 인간을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선생님이 있던 자리는 어디인지, 빈터로 남은 용산의 그 공간, 빈집으로 남은 주해의 공간에 대해 왜 그 안의 사람을 몰아내는 일이 그리도 성급해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공간은 이미 빈터나 빈집이 아닌 기억을 가진 “밤 공간”13)으로 우리에게 자리한다. ‘밤 공간’과 여성의 자리가 닮은 데가 있다면 그것은 낮의 몽타주를 기억하는 타자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재배치를 꿈꾸는 자가 온전히 설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아직은 많은 공간들이 불친절하다.


11) ‘부끄러움’에 대한 정의와 구분은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출판사, 2017, 45쪽, 250~251쪽 참고.
12)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류의근 역, 문학과지성사, 2002, 424쪽.
13) 모든 공간은 반성하는 자에 대하여 그의 사고에 의존해 지탱되지만, 그 사고는 아무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밤 공간에서는 내가 그것과 결합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밤은 통일성이며 전체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대낮의 몽타주를 보존할 수 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 앞의 책, 428~429쪽 참고.


나가며 : 이름 지우기


유대교에서 신의 이름은 아홉 개이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고유명사일 뿐, ‘신(God)’과 같은 일반명사는 없다. 그러니까 신의 이름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암호이다. 이름을 온전히 지켜내기 위한 이 환대의 방식은 어쩌면 신을 규정하지 않으려는 진정한 윤리적 실천이다. 조건 없이 타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어떤 이름으로도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름의 말소야말로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는 진짜 주문이다.14)
많은 여성들이 사회로 나왔고 몇몇 여성들은 성공한다. 그러나 성공한 여성들의 사례는 아직도 특이점으로 회자되고, 다수의 여성들이 ‘쉬운’ 노동력으로 쓰이며 비주류로 밀려나고, 출산과 육아를 ‘독박’하면서 사회로부터 단절되며 ‘아줌마’, ‘맘충’과 같이 비하된다. 그 뒤는 자기혐오가 수순처럼 따라붙는다. 통계라는 숫자에는 많은 여성들이 서 있는 우리 사회의 주변부, 비주류의 그늘이 삭제되어 있다. 우리는 가정과 사회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특별한 이름을 끝내 지워나가야 한다. 일과 가정에서 요구하는 여성에 대한 이중적 기대와 여성이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인식의 재정비가 필요한 지금, 쉽게 덧씌워진 정치‧경제적 호명에 가려진 많은 여성들의 진정한 이름을 부르기 위해, 지금, 여기, 구체적인 공간에서, 구체적인 문법으로의 실천은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 인식의 출발점이자 실천 장 혹은 자리로서 우리 문학은 보다 많은 여성들을 돌아보고 그 이름과 자리가 온당한 것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지금이 그, 때다.


14) 서동욱, 「주문으로서의 이름」, 『일상의 모험』, 민음사, 2005 참고.

황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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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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