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대한민국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공식 누리집 주소 확인하기

go.kr 주소를 사용하는 누리집은 대한민국 정부기관이 관리하는 누리집입니다.
이 밖에 or.kr 또는 .kr등 다른 도메인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면 아래 URL에서 도메인 주소를 확인해 보세요.
운영중인 공식 누리집보기

포켓몬 자유주의 전사

  • 작성일 2013-03-11
  • 조회수 545

“그래서요.”

“‘그래서’란 말을 할 정도로 간단한게 아니래도.”

오박사는 말을 잇다 지쳤는지 켁켁거렸다. 왼손으로 연구소 한 켠의 주전자를 가리키며, 눈으로는 연신 건네달란 시늉을 했다. 하지만 원하는 반응은 구차한 시늉을 반복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주하고 있는 청년의 인상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몬스터볼이 그려진 야구모자에 가려진 깊게 패인 눈이 몹시 사나워보였다.

청년은 모자를 좀 더 꺾어 눌러쓰고 말을 되받았다.

“정리하자면, 야생 포켓몬을 공격해서 빈사 상태로 만들고 플라스틱 공 안에 감금시키라는 것이지요. 이따금 살인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렇지, 어휘 사용이 좀 거칠긴 했지만 요점은 바로 그거야. 그걸 반복하면서 150종만 모으면 된다고.”

오박사는 촐싹대는 표정을 하며 두 손을 파리처럼 삭삭 비볐다. 청년은 이래저래 기분이 불편했다. 새디즘이 묻어나는 일종의 실험, 그 굴레 안으로 은근슬쩍 끌어당겨진 것이다. 청년이 이 모험을 가장한 동물 폭력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은 마을에 붙여진 50년대 풍 포스터 때문이었다. 그의 눈을 사로잡은 캐치프라이즈는 ‘정부 지원금’과 ‘야생 동물과의 교감’이었다. 하지만 그 아래 조그맣게 ‘공공 이익을 위한 동물 수집’이란 글귀가 있었음은 청년이 간과한 사실이었다. 벼룩만큼 작아 누구나 스쳐 지나가는 게 당연할만한 글씨였다.

“150마리를 생포했다 칩시다. 그 포켓몬들은 어떻게 됩니까.”

청년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오박사는 그저 낄낄 웃으며 담배 연기를 뿜기만 하다가 말했다. 이봐요, 아직 젊은 사람들이 몰라도 되는 게 있는 거여요. 21세기의 메카니즘은 다 그런거에요. 지우씨는 그냥 자기 바운더리를 지키면서 일하기만 하면 된다고.

청년은 오박사의 위악적인 태도가 무척이나 어설프게 보였다.

“그건 저도 압니다. 불이나 좀 빌려주십쇼. 저도 한 대 피우게.”

오박사는 190cm에 달하는 이 거구의 청년이 인상을 슬쩍 구기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렇지만 심리적 우위를 놓치고 싶지 않은 타개책으로 오박사는 코웃음치며 성냥을 한 갑 던져줬다.

그는 뒤돌아선 김에 선반 위에서 몬스터볼 하나를 골라내었다. 그 플라스틱 공에는 ‘피카츄’란 이름이 유성 매직으로 갈겨쓰여있었다. 오박사는 몬스터볼을 지우에게 넘겼다.

“이 놈은 워낙 유명한 놈이라 설명하는 것도 입이 아깝지. 피카츄란 놈인데.”

오박사는 머리에서 생각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가 힘든지 잠시 말을 끊었다.

“...아주 성질이 더럽고... 질투심이 강한 놈이야. TV쇼에서 이 놈들이 전기 만드는 거 봤지? 미니카 막 굴러가고 그러잖아.”

그는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지우는 그게 몹시 역겹다고 느꼈다.

“여하튼 그렇게 유명한 놈이고, 전력 생산량도 무시 못해. 여행중에 근처 발전소에 팔아버리면 떡볶이 사먹고 버스 카드 충전하고 맥콜 한 캔 사먹을 수 있을걸.”

오박사는 방금 자신이 무척 재밌는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는지 과장되게 큭큭 웃었다. 지우는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다. 백 마리만 발전소에 넣어도 도시 하나가 운영되니 이 얼마나 좋은 세상이냔 말이지. 사과를 주고 전기를 얻어내는 건 엄청난 일이라고. 인류의 축복아니겠어.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제가 포켓몬 마스터가 돼서 150종을 잡게 되면...”

“그 150종은 생체 실험에 쓰일거야!”

지우는 눈에 힘을 주고 오박사를 노려보았다. 미동도 없던 전신에서 눈빛만이 살기를 띄었다. 오박사도 그것을 느꼈지만, 지우가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왠지 신이 나는지 그대로 말을 이었다.

“지우씨는 이 산업 전선의 최일선에 선 사람이라고. 최고급 상품을 납품하는 게 업적 도리요 공공의 이득이란 말이지. 질이 낮으면 학교 급식에나 나오니까 그 점 주의하라고? 아님 가죽 세공업자한테 넘어갈 수도 있겠지.”

“나는 이따위 일을 하고 싶어서 공부를 하고 포켓몬 트레이너가 된 게 아닙니다. 나름 공무원인데 이런 비윤리적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기대한 건 관리 수용이지 노예 수집이 아닙니다.”

“보쇼, 지우씨. 세상의 포켓몬 트레이너는 한 둘이 아니거든. 무진장 많다고. 지우씨도 어른이 되면서 어찌되든 조금씩 포켓몬들의 노동력을 먹고 자랐단 말야. 이제 와서 뭐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 건 위선 아냐?”

“박사님은 권위자가 아닙니까. 당장 눈 앞에 있는 문제가 대수롭지 않다 이겁니까.”

그 말을 들은 오박사는 의자를 지익 끌고 지우의 바로 눈 앞에까지 가서 눈을 맞추었다.

“야, 이 새끼야. 열심히 공부해서 9급직 따놓고 일을 망칠 생각이냐. 그냥 여기서 조용히 나가면... 맹수 조련의 마스터가 되면... 국가에서 의원급으로 대우할거라고! 여자도 마음껏 후리고 사람을 굴리는 권력을 쥐게 될 건데 젊은 놈이 뭐 이리 거르는 게 많아? 말 길게 하지 말고 나가. 귀찮으니까.”

지우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을 주머니에서 빼고 왼손으로 모자를 고쳐썼다.

“그래, 이 새끼야. 나 갓 초임한 말단직이다. 전과하느라 부모님 등골 좀 빼먹고 군대도 늦게 다녀와서 이래저래 청춘에 지장이 많았다, 이 개새끼야.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양이다, 이 개새끼야. 근데 나 같은 병신 새끼도 수치스러운 게 뭔진 안다. 신문에 칼럼도 올린다는 지식인 새끼가 이 모양이라니 토악질이 난다.”

“아니, 이 사람이...”

“너는 악이다, 악의 첨병이다!”

절규 같은 외침이 끝나는 순간, 지우는 오른손에 온 몸의 체중을 실어 오박사의 왼쪽 턱을 후려갈겼다. 우둑하는 소리가 연구소를 울렸다. 딱딱한 뼈의 감촉이 살을 찢고 지우에게 그대로 전해져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오박사는 아얏 소리조차 내질 못했다.

“일어나.”

“이런 미친 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지우의 구둣발이 오박사의 얼굴로 날아왔다. 오박사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턱 끝에 간신히 스치는 정도로 피해를 줄였다. 오박사는 그대로 뒤로 허둥지둥 기어가 피카츄가 들어있는 몬스터볼을 땅에 박듯이 던졌다. 그러자, 삐잉, 하는 소리와 함께 피카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피카.”

그것은 배고픔과 고독으로 내장이 부패한 듯 한 목소리의 피카츄였다. 털은 종 특유의 윤기를 잃었고 귀는 땅을 내려다보며 접혔다. 오직 뺨만이 야수의 자존심을 살리겠다는 듯이 유독 붉었다.

“피카츄! 나는 네 주인인 오박사다. 당장 저 백수 놈을 지져버려!”

충혈된 눈의 피카츄는 잠시동안 멍하니 있었다. 세상 빛을 본지도 오래된 까닭이었다. 모자를 쓴 거구의 남자와, 지난 3년간 인정사정 없던 자신의 주인이 눈 앞에 있었다. 피카츄는 주저없이 지우에게 달려가 엎드려 배를 보였다. 새로운 주종관계의 시작이었다. 둘은 빠르게 시선을 나누었다.

“네가 피카츄냐.”

“피카, 핏, 핏, 피카츄.”

피카츄의 목소리는 전투 베테랑답게 날이 서려있었다. 자유를 위해 총칼을 든 자유주의 전사의 목소리... 지우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내 머리에 올라타라! 경찰이 오기 전에 저 놈을 박살내겠다.”

오박사는 괴성을 지르며 쇠파이프를 들고 곧장 지우에게 돌격해왔다. 이성을 잃어 포효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야만적인 모습이었다.

“자기력이다, 저 쇠파이프를 봉쇄해라, 피카츄!”

피카츄는 뺨에서 강한 자기력을 뿜어내어 쇠파이프를 컨트롤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지우가 날렵하게 뛰어들어 오박사의 양 턱에 원 투 펀치를 날린 것은 그와 거의 동시였다.

“사람은 생각하고 노예는 복종한다, 복종한다, 복종한다...”

오박사는 뇌에 충격을 받아 전신에 힘이 풀려 서서히 쓰러지며 중얼거렸다. 지우는 이제 빼도박도 못할 범죄자가 되었다.

“피카츄. 나는 네 고향, 상록숲에 가겠다. 거기서 노예 포켓몬들을 모아 봉기하자, 만국의 포켓몬 프롤레타리아의 시대가 왔음을, 이 날, 여기서 다짐하겠다.”

지우는 피카츄의 뺨을 쓸었다. 피카츄는 흐르는 눈물이 뺨의 전력에 닿지 않게 조심조심 우는 모양새였다.